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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남자의 시선/요남자의 패션 아이템

명품이란 무엇이가?

명품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나 음악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감동을 선물한다. 명품이라고 불리는 패션도 감동을 선물한다는 점에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굳이 값비싼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 아니더라도, 명품은 믿을 수 있는 것이거나 오랜 세월을 두고 쓰면 쓸수록 빛을 발하고 질리지 않는 것, 희귀성이 있는 것,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개인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것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명품은 꼭 값비싼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그 자체만으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품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난 물건이나 작품'이지만, 명품이라는 우리말에 대응하는 영어의 럭셔리(Luxury)는 사실 호사품이나 사치품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럭셔리의 어원은 호사스러움을 뜻하는 라틴어 룩수스(Luxus)에서 파생된 룩수리아(Luxuria)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말은 극도의 사치 또는 부패를 뜻한다. 명품의 쓰임새를 살펴봐도 상류층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물건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근 들어 명품은 모든 제품 중에서 최고 중의 최고, 가장 품질이 좋은 제품,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같은 제품 중에서 가장 비싼 제품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명품 패션 브랜드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장인의 손에 의해 탄생된 상질(上質)의 제품으로 고객에게 지속적인 신뢰와 만족을 준다. 최고급 소재와 절제된 디자인,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고수되는 질 높은 제작 공정과 소량 생산의 원칙은 모든 명품 브랜드가 이어 가고 있는 장인정신의 산물이다. 해외의 콧대 높은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이나 액세서리, 보석류를 가리켜 스스럼없이 '작품'이라고 칭하며, 고유의 작품기호와 일련번호까지 부여합니다.



과시적인 소비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1980년대부터 명품 브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기록하였다. 각 브랜드마다 가격과 타깃층을 낮춘 세컨드 브랜드를 개발하고, 스포츠 라인을 새롭게 런칭하며, 스타나 일류 모델을 기용한 광고 전략으로 보다 많은 고객층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1980년대부터 서서히 시작된 해외 브랜드의 라이선스 정책과 수입 브랜드의 도입으로 연간 해외 명품 브랜드의 전체 시장 규모는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오면서 현재 1조 원을 초과하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베블런(Veblen)은 이미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부자들의 '과시적인 소비'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부유층과 상류층의 명품 소비 지향 현상의 원인을 "자긍심을 느끼는 동시에 주위 동료나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아무리 가격이 비싸더라도 제품이 갖고 있는 라벨 자체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되거나,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지갑을 열게 된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품 소비의 본래 목적을 대중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거나, 자신이 추종하는 세력이나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나타내는 데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인이 명품의 지속적인 인기와 판매 급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왕족이나 귀족, 상류층의 차별화 욕구와 과시욕에 의해 명품 소비가 형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일반 소비자 역시 명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심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고급 또는 고가의 명품 소비가 더 이상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를 소비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현대 사회의 소비 형태가 단순히 제품을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이 지닌 기호, 즉 상징을 소비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소비사회에서는 이미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가진 소비자에게 어떤 특정 제품의 소비를 통해 '당신은 특별한 사람, 선택받은 소수'라는 상징으로 감성과 욕구를 자극하여 필요 이상의 것, 즉 '더 나은 것'에 대한 소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제품 그 자체나 필요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돈을 쓰는 그 이상의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일이 기업이나 소비자 모두에게 중요해진 것입니다.



명품 브랜드들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며 전략적인 광고 이미지로 제품이 갖고 있는 그 이상의 이미지를 생산하여 명품의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누릴 수 없는 상상의 세계, 동경의 세계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을 품고 산다. 명품 브랜드가 펼치는 광고의 상징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가 꿈꾸는 신화와 환상의 세계이다. 따라서 소비자는 제품 그 자체의 실용성이나 필요성보다는 제품이 상징하는 신화적인 요소와 환상에 이끌리거나 치중함으로써 소비를 하게 되는데, 결국 이러한 소비 행위는 소비의 고급화를 추구하게 되며, 소비의 고급화 추세는 바로 명품 소비와 직결됩니다.











명품 브랜드 탄생의 배경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의복 생산은 여전히 소규모의 특수한 기술을 가진 장인의 손에 머물러 있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섬유와 의류제작의 기계화 생산이 도입되자 기존의 수공예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기성복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패션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의 패션은 오랫동안 코르셋, 페티코트 등 신체의 특정 부위를 억압하거나 조이는 속옷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비로소 신체를 불편하게 하거나 거추장스러운 속옷과 겉옷으로부터 해방되면서 패션은 여성들에게 새롭고 신선한 것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패션 디자이너들이었다. 파리의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컬렉션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패션계에서 최초의 디자이너로 기억되는 찰스 프레드릭 워스(Charles Frederic Worth)는 가장 처음 오늘날의 패션쇼 형태의 컬렉션을 개최한 인물입니다.


20세기에 가장 기억될 만한 디자이너로 샤넬이 있다면, 파리가 패션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세기에 등장한 워스의 역할이 컸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고급 맞춤 의상실(오트쿠틔르: Haute Couture)은 20세기 초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로 명성이 자자했다. 워스의 활발한 디자인 활동으로 인하여 당시 남성과 여성의 의상을 제작하던 '재단사'라는 호칭은 '창작 디자이너'로 그 신분이 격상될 수 있었습니다.


워스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언제든지 입어볼 수 있는 의상들을 가게에 진열해 놓았으며, 가게 안은 늘 화려한 샹들리에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아내였던 유제니 황후의 공식 석상용 의상과 이브닝드레스를 독점해서 만들 정도로 왕실로부터 인정받는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사실 워스 이전의 의상은 디자인 자체의 독창성보다 옷감 자체가 중요시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워스가 패션계에 영향을 끼친 것은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왕비와 공주, 황후, 대사 부인들의 의상을 직접 제작함으로써 자신을 비롯한 디자이너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은 물론 왕족에게 옷을 입힌 파리의 디자이너들의 이름이 상표화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특정 고객을(주로 상류층이나 왕실 사람들) 대상으로 의상이나 가방을 만들기 시작한 디자이너들과 유럽의 장인들에 의해서 하나의 명품 브랜드가 탄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명품의 컨셉



소위 명품 브랜드사가 제시하는 브랜드의 절대적인 이미지는 대부분 고급스러움과 격조 높은 상류층 사회를 표방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컨셉(Concept)이란 패션 회사들이 자사의 상품 개발을 위해 설정한 개념, 혹은 전체적인 경향을 의미하는 말이다.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고수하면서 이미지에 걸맞는 고품격의 우아한 디자인과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들을 고객에게 선보이고 있는 명품 브랜드들의 컨셉은 하나같이 클래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절제된 우아미와 세련미 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국내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럭셔리 Luxury』 『노블레스 Noblesse』 『프레스티지 Prestige』 『네이버 Neighbor』 등과 같은 이른바 명품 브랜드 제품만을 광고하는 잡지들이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 역시 최상의 삶, 하이클래스(High Class)를 위한 라이프스타일의 제시입니다.


명품의 사전적 의미가 뛰어난 물건이나 작품을 의미하는 것처럼 뛰어난 디자인과 품질이 아니면 명품이 될 수 없다. 대량생산 방식에 의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니라, 탁월한 기교와 솜씨를 자랑하는 장인의 한땀한땀 노력에 의해 탄생하는 하나의 예술품과 같은 명품을 누리고 선택하는 하이클래스의 삶 자체가 명품 브랜드의 컨셉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명품의 상징, 로고



C자를 맞대어 놓은 샤넬 브랜드의 로고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루이비통의 LV, 구찌의 G, 랄프 로렌의 폴로 선수 도안, 페라가모의 간치니(말발굽) 문양 등 로고와 문양만 보고도 이미 우리는 그것이 어느 브랜드 제품이며 얼마나 값비싼 제품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때로는 로고를 드러내면서 혹은 의도적으로 애써 로고를 작게 하거나 아예 감추어 버림으로써 브랜드의 신비감을 조성하려는 명품 브랜드들의 로고를 둘러싼 많은 시도들이 공공연히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패션계에 새롭게 럭셔리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던 198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과시적인 패션을 지향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패션에 있어 돈과 이미지는 그 어느 때보다 밖으로 드러내려는 경향이 강했다. 사람들은 고가의 명품 브랜드 의상과 액세서리를 소비하고 착용함으로써 자신을 차별화 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재력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명품 브랜드의 로고야말로 이들의 욕구에 즉각적으로 부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면에 로고가 새겨진 루이비통 가방, F자가 역대칭으로 맞물린 펜디의 핸드백, 깔끔한 C 로고의 샤넬 장신구와 핸드백, G 로고가 버클 형태로 디자인된 구찌의 벨트, 번쩍이고 화려한 외관만으로도 단번에 어느 제품인지 알아볼 수 있는 로렉스와 까르티에의 시계, 금속 삼각형 모양의 로고가 박힌 프라다 가방 등은 제품 자체의 우수한 품질과 디자인에 앞서 이미 널리 인지된 로고와 외관만으로 특정 브랜드의 얼마나 값이 나가는 제품인지를 쉽게 판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버버리의 체크 무늬나 에트로의 페이즐리 문양, 미소니의 컬러 패턴, 프라다의 나일론 천과 같이 특정 브랜드의 대표적인 소재나 패턴 역시 로고만큼이나 브랜드를 잘 표현하는 요소이다. 그러다 보니 역으로 손쉽게 가짜, 즉 일명 '짝퉁'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물론 명품에 대한 높은 인기와 수요 자체가 가짜 상표의 생산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글자체가 다르거나 로고의 재질, 혹은 색상이 미묘하게 다른 가짜 로고가 부착된 자사의 모조품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거대한 명품 브랜드답게 짝퉁의 남발 자체가 브랜드의 인기도 때문이라는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명품 브랜드사도 있습니다.


명품 브랜드는 창업자의 이름이 그대로 브랜드명, 회사명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 자국이 아닌 해외의 소비자들에게는 그 이름이 읽히기 어렵거나 쉽게 기억시키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이를 대신하여 한눈에 쏙 들어오는 간결하고 세련된 브랜드의 로고야말로 브랜드명과 제품을 인지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급기야 많은 명품 브랜드들은 이미 소비자들에게 잘 각인된 자사의 로고를 제품의 장식적인 측면에까지 이용하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상승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소비자들의 명품 소비 목적에는 실제 상품의 소유보다는 로고를 소유하고자 하는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이를 마케팅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품 브랜드의 세계



가내 수공업 형태로 시작되었던 명품 브랜드들은 계속되는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자사 브랜드명이 부착된 보다 많은 품목을 개발하여 고객층의 확대를 꾀하였다. 이러한 자구책으로 소위 명품의 대중화를 이끌어내며 수익을 증대시킬 수 있었지만, 오히려 늘어난 고객층을 상대로 하는 마케팅에 대응하기 위해서 지주회사를 찾거나 인수·합병(M&A)의 경영 방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고객층의 확보와 매출 신장을 위해 보다 많은 품목을 개발, 확대하게 되면서 명품 스스로가 상업주의로 전락하며 획일성, 저속성의 경향을 띄게 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해외 명품 브랜드 역시 치열한 패션 시장에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기존의 무겁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최첨단 유행을 선도하는 신선한 브랜드로 거듭나기 위한 이미지 변신과 다양한 품목의 개발로 매출 신장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 같은 철저한 마케팅 능력이야말로 명품이 명품으로 오랫동안 고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품 자체의 뛰어난 디자인과 품질만으로도 고객의 시선을 끌 수 있겠지만, 선진적인 마케팅 능력이야말로 브랜드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새로운 시장의 확대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매출 신장이라는 기업의 목표를 달성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성공은 이러한 마케팅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는 자본력과 조직력을 지닌 그룹의 존재가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명품 브랜드의 세계에서 명품의 수도라 할 만한 파리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파리의 패션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명품 브랜드의 세계에 관해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명품 산업은 80여 개에 달하는 명품 업체의 연합회인 코미테 콜베르(ComitéColbert)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협회 차원의 명품 코미테 콜베르 이외에 명품 산업에서 차지하는 세계 4대 명품 그룹의 영향력 역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세계 명품 시장을 주도하며 4대 그룹 중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의 LVMH, 그리고 스위스의 리치몬드 그룹, 이탈리아의 구찌 그룹, 프라다 그룹이 이에 속한다. 프랑스의 명품 협회와 이들 명품 그룹의 활동을 이해하면 명품 브랜드의 지속적이며 거듭되는 성공의 비결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명품 패션의 중심지, 파리



패션의 발전 초기단계에 실, 옷감, 의상의 제작은 가정이나 소규모 작업실 또는 상점의 여성과 장인들에 의해 수공으로 생산되던 것이 전부였고, 재단사가 남성과 여성의 외출복 모두를 제작하고 있었다. 가장 간단한 의류조차도 수공으로 재단되고 바느질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복은 개별적인 고객의 주문에 따라 맞춤 제작되었으며, 부유층을 위한 유행 의류는 특정한 기술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천과 의복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의 산물이었으나 높은 가치가 있는 상품이었으며, 패션 전반의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 의복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직조업과 자수업에 이르는 모든 부속과 장신구 분야의 발전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최초로 오늘날의 패션쇼 형태가 파리에서 개최되자 파리의 패션을 보기 위해 해외로부터 몰려든 바이어와 저널리스트들이 파리 패션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한정되었던 파리 디자이너들의 최신 패션은 유럽과 미국으로까지 디자인 견본이 팔려나가게 되었다. 이때의 컬렉션은 다음에 설명하게 될 오트쿠틔르 형식의 컬렉션이었다. 미국의 바이어들은 주문을 전제로 파리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에 입장할 수 있었고, 컬렉션에서 발표되는 파리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은 널리 미국에 판매되어 수많은 모조품이 생산되었습니다.


19세기의 파리 백화점(프랑스에선 이미 1800년 초에 백화점이 창설되었다) 형태는 개별적인 고객의 주문에 따라 맞춤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카탈로그와 통신 주문을 통해 패션을 판매하게 됨으로써 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패션을 소개할 수 있었고, 패션 잡지는 전 세계 독자들에게 파리 최신 패션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기성복 패션이 본격적으로 활기를 띄게 될 1970년 이전까지 파리의 패션은 오트쿠틔르가 완전히 주도하고 있었으며, 오트쿠틔르 존재 자체가 파리 패션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리 오트쿠틔르는 외국의 기성복 업체들에게 디자인 견본을 판매함으로써 상당한 수입을 거둬들일 수 있었던 반면, 그들이 자국에서 파리 오트쿠틔르 디자인복제품을 무단으로 대량 생산하여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파리의 패션은 미국을 비롯한 해외로 모델과 스케치를 활발히 팔 당시만 하더라도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과히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파리로 향하는 왕래가 두절되어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각기 독자적인 패션의 길을 걷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오히려 자국 패션 시장을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반면 파리 패션은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파리의 고급 의상점 관련자들과 제조업자들은 이미 19세기 중엽에 하나의 협회를 구성하여(파리 고급 의상점 조합: La 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 Parisienne) 조합원 상호간의 단합을 도모함은 물론 파리의 패션을 해외로 알리는 업무를 수행했다. 20세기 초, 고급 맞춤의상실을 경영하는 쿠틔르 조합이 협회에서 분리해 나옴으로써 개별 고객을 위한 맞춤의상실인 오트쿠틔르와 일반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성복 제조업간의 활동이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오트쿠틔르와 후자에 해당하는 프레타포르테라는 두 가지 형태의 패션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각기 개별적인 컬렉션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오트쿠틔르



오트쿠틔르(Haute Couture)에서 쿠틔르(Couture)는 불어로 바느질 혹은 꿰맨다는 의미이며, 쿠틔리에(Couturier)란 남자 재봉사를, 쿠틔리에르(Couturiere)는 여자 재봉사를 뜻한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쿠틔리에(혹은 쿠틔리에르)는 하찮은 신분의 직업에 해당했다. 이들은 양복을 짓는 재단사와 란제리 제조업자에게 고용되어 그들의 명령에 따라 옷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17세기 말엽,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서 쿠틔리에(르)들이 직접 남녀 고객에게 옷을 만들어 입힐 수 있도록 허락되면서부터 이들은 명망 높은 고객들을 직접 자신의 메종(Maison: 쿠틔르 비즈니스, 후에 House라고 불리게 됨)으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사회적인 지위까지 상승하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 시작된 오트쿠틔르는 질이 높은 디자인이나 옷을 만드는 일을 뜻하게 되었고, 패션계에서는 흔히 고급 의상실을 의미하게 되었다.


파리의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맞춤복을 전문으로 하는 오트쿠틔르 형태로 디자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오트쿠틔르는 규모면에서 의상실보다 '패션 하우스'라는 확대된 개념으로 해석되고 있다. 오트쿠틔르의 디자이너들은 현재까지 오트쿠틔르 조합 위원회에서 정한 엄격한 규칙을 준수하며 활동하고 있다. 오트쿠틔르 소속 디자이너들은 첫째, 파리 현지에서 모든 작품 활동을 수행해야 하며, 매년 1월과 7월에 개최되는 연 2회의 컬렉션에서는 최소 50여 작품 이상을 발표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작품은 10명 이상으로 구성된 뛰어난 장인들의 정교한 수작업으로 제작되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오트쿠틔르를 위한 고도의 수작업에는 자수, 레이스, 깃털 장식 등과 같은 부수적인 장식물 제작까지 포함되므로, 오트쿠틔르 작품 제작에 걸리는 시간만도 대개 100시간에서 200여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다. 오트쿠틔르는 디자이너의 뛰어난 독창성과 디자인, 그리고 고도로 숙련된 장인들의 기술이 보태어진 최고 수준의 작품만을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오트쿠틔르의 주 고객은 왕족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상류층, 아랍의 석유 부호들과 같은 부유층, 그리고 연예계 스타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오트쿠틔르는 노동집약적인 생산과정으로 인해 가격이 더욱 상승하고, 오트쿠틔르에 눈을 돌리는 부유층 고객의 수가 점차 감소하는 등의 부정적인 요인으로 인해 그 인기와 명성이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오트쿠틔르 작품의 디자인이 다른 컬렉션이나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에 아이디어가 도용되거나 빈번히 모델이 무단 복제되는 수난을 겪는가 하면, 급격히 성장하는 기성복(프레타포르테)으로부터 상당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68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던 발렌시아가는 오트쿠틔르의 종말을 예고하며 자신의 오트쿠틔르 의상실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1971년 샤넬의 사망으로 파리 오트쿠틔르의 앞날은 더욱 예측불허의 상태에 빠졌다. 결국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오트쿠틔르의 고객수가 전 세계적으로 2~3천 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정기적인 고객의 수는 그보다 훨씬 적은 6~7백 명에 그치게 되었다. 오트쿠틔르 디자이너들은 기성복과 향수, 화장품과 같은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파리 정부와 여타의 재정적 후원 역시 오트쿠틔르가 그 창의적인 역량을 발휘하며 존속되는 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오트쿠틔르 컬렉션은 세계 각국의 패션 저널리스트들과 패션 관계자들로부터 존속의 우려와 찬탄을 동시에 받고 있다. 하지만 오트쿠틔르 존속에 대한 우려는 결코 현실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오트쿠틔르의 존속은 오트쿠틔르를 통한 파리 패션의 홍보 효과뿐만 아니라 라이선스를 통한 다양한 상품의 이미지 상승효과 등의 간접적인 이윤 추구와도 직결되는 것입니다.


특히 향수와 화장품, 그밖에 스카프와 넥타이, 선글라스 등과 같은 액세서리 품목은 브랜드의 이미지에 힘입어 오트쿠틔르의 매출 신장을 극대화 시켜 주고 있다. 또한 오트쿠틔르의 존속은 파리가 영원히 패션의 수도로서 그 명성과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프레타포르테



프레타포르테는 오트쿠틔르의 맞춤복과는 구별되거나 대조되는 형태의 고급 기성복을 의미한다. 복잡한 디자인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던 오트쿠틔르의 의상 제작비는 단연히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으며 일반 시민과 노동자 계층은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프레타포르테, 즉 고급 기성복이란 처음에는 오트쿠틔르 작품을 재단과 봉제면에서 어느 정도 수정을 가하여 일반화 시킨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1824년 재봉틀의 발명 이후 노동자들과 소시민 계급을 겨냥한 기성복 시장은 봉재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백화점의 출현으로 기성복의 새로운 소비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929년의 경제대공황이 모든 사회계층의 소비형태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기성복 업체는 보다 폭넓은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백화점을 비롯한 기성복 업체의 출현은 감히 패션을 의식조차 할 수 없었던 일반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점점 패션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던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50년대 말, 파리의 오트쿠틔르 디자이너들은 작품의 무단 복제와 오트쿠틔르의 고객 수가 줄어드는 문제점에 직면하게 되면서 프레타포르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샤넬, 크리스찬 디올, 지방시, 이브 생 로랑, 웅가로 등의 파리 오트쿠틔르 소속 디자이너들이 오트쿠틔르뿐만 아니라 프레타포르테 컬렉션도 동시에 전개하게 되었다. 오트쿠틔르보다 단순화된 공정과 수익면에서도 안정적인 프레타포르테의 장점으로 인해 점점 프레타포르테의 참가 디자이너 수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제2세대 디자이너들이라 불리는 신진 디자이너들이 대거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참여하게 되면서 파리 프레타포르테는 더욱 활기를 얻고 발전하게 되었다.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은 매년 오트쿠틔르 컬렉션이 끝난 후인 3월과 8월에 열린다.


산업과 패션을 동시에 접목시켰다고 평가받는 프레타포르테는 점차 세계 각국의 유능한 디자이너들의 참가가 두드러지고 있다. 오트쿠틔르와는 달리 파리 현지에서 직접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할 수 있는 것도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의 수가 증가하는 요인이다. 또한 해외의 바이어와 저널리스트들의 발길이 가장 많은 파리 프레타포르테의 무대는 패션 디자이너에게는 여전히 꿈의 무대인 것입니다.




코미테 콜베르



명품을 매개체로 자국 프랑스의 이미지를 국내외로 알리고자 했던 겔랑 화장품사의 장 자크 겔랑 회장과 오트쿠틔르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뤼시앙 르롱에 의해 1954년에 결성된 프랑스의 코미테 콜베르(ComitéColbert)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급 명품 제조 업체들이 모여 발족시킨 협회이다. 오트쿠틔르의 소속 브랜드인 크리스찬 디올과 지방시, 에르메스, 루이비통 등에서부터 스포츠 브랜드인 라꼬스떼를 포함하는 패션 업체 이외에도 향수, 크리스털, 시계, 보석, 양주, 제과 업체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 80여 개가 협회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습니다.


코미테 콜베르 협회의 창립 목적은 장인정신에 입각하여 환상적인 명품을 만들어 내는 장인들의 기술을 존중하고 알리는 가운데 명품 자체가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활력소가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다. 또한 협회에 소속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명품 브랜드가 오랜 기간 동안 획득한 그들만의 독보적인 노하우와 장인정신을 다양한 이벤트와 이색적인 행사를 통해 세계 각국에 홍보하는 일이다. 코미테 콜베르는 프랑스인들의 패셔너블한 스타일을 전달하는 최적의 문화 메신저의 역할을 수행하며 자국 명품 브랜드의 대중화를 협회 차원에서 실행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LVMH



프랑스가 전 세계 명품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 Louis Vuitton Monët Hennessy) 그룹은 그 중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며 세계 제1위의 명품 업체로 군림하고 있다. LVMH사는 꼬냑과 샴페인으로 유명한 모에 헤네시사와 가죽 가방으로 세계적인 선두 명품 브랜드인 루이비통사가 1987년 합병하면서 창립되었다.


그 후 1987년 세린느 인수를 시작으로 1988년에는 지방시, 1993년 겐조, 1994년 겔랑, 1996년 로에베, 1999년과 2000년에 이르러 펜디 그리고 태그 호이어, 쇼메 등의 시계·보석업체를 비롯, 메이크업 포에버, 베네팃 코스메틱 등의 화장품 업체까지 차례대로 인수하였다. LVMH의 브랜드 잠식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는 미국의 도나카렌 인터내셔널사(DKI)까지 인수함으로써 미국 기업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브랜드와 브랜드의 지분뿐만 아니라 면세점 구역에서 이들 제품을 한자리에 놓고 판매하는 다국적 유통 전문 업체인 DFS(Duty Free Shop)와 화장품 전문 유통 체인인 세포라(Sephora), 명품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인터넷 쇼핑몰 e-luxury.com 등도 LVMH 그룹 산하에 속해 있으니 명품 세계에 있어서 LVMH의 막강한 파워는 견줄 만할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제품에서 유통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고가 사치품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LVMH의 총 책임자인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는 1984년 크리스찬 디올의 지주회사였던 부삭(Boussac)을 매입하면서 명품 시장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그 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유명 명품 브랜드를 속속 인수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명품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명품의 대중화는 곧 매출의 증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호화 고가 산업의 황제', '패션의 황제'로 불리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파생시켜 나아가는 것이란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역량으로 LVMH는 빠르게 성장해 갔으며, 현재 LVMH가 거느리고 있는 브랜드는 60여 개를 넘어서고 있다. 즉, LVMH사는 M&A를 통해서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융통성 있게 대응하는 것을 늘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성공의 요체로 삼는다. 우수한 디자인력에도 불구하고 경영에 어려움을 느끼는 명품 브랜드를 인수하여 LVMH사의 자본력과 선진 경영 시스템, 그리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통망을 통해 흑자 경영으로 돌아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줌으로써 양자 간에 많은 수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이들 경영의 방침인 셈이다.


그의 번뜩이는 경영 능력은 1990년대 중반부터 전통 있는 디자이너 하우스의 책임 디자이너 자리에 신진 디자이너를 대거 영입한 점에서도 돋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로 크리스찬 디올의 디자인을 영국의 재능 있는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에게, 지방시에 알렉산드 맥퀸, 루이비통 여성복 디자인을 미국의 마크 제이콥스로, 세린느의 디자인을 마이클 고어스로 담당하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명품 브랜드들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뿜어내는 새로운 에너지로 재정비되었고 창의성과 혁신성이 가미되어 브랜드 이미지는 새롭게 활성화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신진 디자이너들의 활약으로 전통 명품 하우스가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생성해 낼 수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면서 고객들의 찬사와 브랜드의 재탄생이라는 두 가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흔히 패션 산업은 이미지 산업이라고 말한다. 즉, 소비자들에게 보다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이를 계속해서 관리해 나가는 것이 패션 산업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명품 브랜드는 매우 높은 가격을 특성으로 하는 만큼 소비자들의 브랜드에 대한 기대 수준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따라서 차별화된 높은 수준의 서비스는 물론 브랜드의 이미지를 고양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에 대해서 LVMH사는 타 기업보다 한발 앞선 입장에서 고려하고 있다.


매출의 11% 이상의 액수를 광고와 판매 촉진 전략에 투자하고 있으며, 창조적이고 범세계적인 캠페인과 스타 마케팅과 같은 세련된 마케팅 기법과 타깃을 분명히 하는 메시지 전달의 수단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활성화하고자 노력한다. 그뿐만 아니라 LVMH사는 럭셔리 브랜드 업계에 알맞은 전문경영인을 육성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해외 주요 비즈니스 스쿨들과 협정을 맺어 MBA 럭셔리 과정을 만들고 이를 후원하고 있다.


자신의 회사에 알맞은 전문경영인을 키워내기 위해 교육과정부터 후원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자사 기업의 성공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제품개발에서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LVMH사가 보여주는 창의와 혁신적인 노력은 럭셔리 브랜드의 열풍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재의 패션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구찌 그룹



1923년 구찌오 구찌에 의해 설립된 구찌는 1950~1970년대의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구찌가(家)의 형제들끼리 제각각 경쟁을 벌이면서 여러 곳에 라이선스를 남발시켜 대량생산하는 바람에 브랜드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던 구찌가 1990년대부터 제2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디자인을 맡게 된 미국 태생의 톰 포드와 경영을 맡은 도미니크 데졸레 구찌 회장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구찌의 여성복 디자이너로 출발한 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톰 포드는 1997년 경영에 뛰어든 데졸레 회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구찌 브랜드를 일약 섹시하고 모던한 이미지로 구축시키는 데 앞장섰다. 무분별한 라이선스는 과감히 정리하였으며 핸드백 등 주로 액세서리에만 집중하던 브랜드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찌의 색깔을 만들어 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구찌 그룹 내에서 톰 포드의 역할은 단순히 수석 디자이너로서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구찌 그룹 산하의 브랜드인 구찌, 이브 생 로랑, 세르지오 로시 등 모든 브랜드의 디자인을 총괄할 뿐만 아니라 구찌의 기업 이미지 구축과 광고, 매장 설계까지 도맡으면서 구찌의 성공적인 재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구찌 그룹의 대주주인 프랑스의 피노–프렝탕–루두트(PPR)와의 이견 속에 2004년 초, 수석 디자이너인 톰 포드와 최고경영자(CEO)인 도미니크 데졸레는 전격 사임을 표명하게 되었다. 구찌의 새 디자이너로는 톰 포드의 수제자인 존 레이가, 신임 사장으로는 폴레트가 임명되었다. 앞으로 이 두 책임자가 이들 뒤를 이어 구찌 브랜드를 어떻게 이끌어갈 지 벌써부터 패션 업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프라다 그룹



프라다는 1913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전문 가죽 제조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창업자인 마리오 프라다의 뒤를 이어 그의 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가 디자인을 맡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그녀는 가죽 제품 소매업을 하던 파트리조 베르텔리로 하여금 '프라다'라는 이름으로 가죽 제품을 독점적으로 유통할 수 있도록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두 사람이 1987년 전격 결혼하게 되면서 미우치아의 디자인 감각과 베르텔리의 경영 능력을 겸비한 프라다는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베르텔리는 프라다의 성공 비결을 "프라다 디자인은 전통적인 패션 스타일을 넘어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 내고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켜 오는 등 시장의 진화를 주도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좋은 제품이란 우연히 나오는 게 아니라, 매일 매일 잘 훈련된 태도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단순하고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감각의 디자인으로 새롭게 급성장한 프라다는 연간 2조 원에 이르는 매출을 자랑하는 이탈리아 최대의 패션 그룹으로서 전 세계에 직영 매장을 두고 제품을 판매·관리하고 있다. 프라다 그룹은 프라다, 미우미우, 헬무트 랭, 질 샌더 등 다수의 브랜드를 인수하며 더욱 거대한 패션 그룹으로 변신하고 있는 중이다.





리치몬드 그룹



스위스의 리치몬드 그룹은 만년필 위주의 필기구에서부터 가죽, 보석, 시계, 안경 등의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거대 명품 브랜드 그룹 중 하나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만년필 브랜드였던 몽블랑을 포함하여 까르티에, 피아제, 던힐, 바쉐론 콘스탄틴, 끌로에 등 20여 개에 달하는 명품 브랜드들이 리치몬드 그룹에 인수되었다. 리치몬드 그룹은 크리에이티브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전문 디자인 양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경영전문가이며 공격적 마케팅과 거대 자본력을 지닌 리치몬드 그룹의 로버트 플라트 사장은 "모름지기 명품이란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능 이상의 무엇을 내뿜어 낼 수 있어야 하고 제품에는 영혼을 담아야한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에서 명품이 고객을 유혹하기 위해선 실제 제품이 보장하는 그 이상의 전략적인 이미지 보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물론 대량생산의 효율성과 그 이익마저 포기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숙련된 장인의 손끝으로 제품 하나하나를 완성해 가고자 하는 장인정신이 바로 명품 브랜드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절대적인 비결일지라도 말입니다.





창작을 중시하는 파리 패션



파리는 패션의 산업화보다 창작을 중시하며 파리의 오트쿠틔르는 파리 최고의 디자이너를 배출해 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브 생 로랑, 지방시, 웅가로, 칼 라거펠드 등의 디자이너들이 오트쿠틔르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경험을 쌓았으며 오늘날도 수많은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오트쿠틔르 디자인실의 장인들로부터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이 바로 파리 패션의 저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파리에서는 고급 의상실 디자이너들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브랜드로 새로운 스타일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르러서는 외국인 디자이너들을 포함한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파리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개최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니아 리키엘, 겐조, 칼 라거펠드, 웅가로, 장 폴 고띠에, 티에리 뮈글레, 클로드 몬타나, 크리스찬 라크르와, 이세이 마야케 등. 이처럼 파리는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가장 선호하는 활동 무대이다. 이는 파리가 재능 있는 디자이너라면 누구에게나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주기 때문이다. 샤넬에서부터 뛰어난 전통을 자랑하는 가죽 제품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명품 브랜드의 역사는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완성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