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남자의 시선/지식인의 서재

트럼프 시대의 미국 그리고 한국의 과제

트럼프 시대의 미국 그리고 한국의 과제




필자 :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월간 인사관리 2016.12 호


미국의 45대 대통령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 대다수 한국 신문은 1면의 통단 톱으로 이 기사를 크게 전했다. 대문짝만한 활자에는 ‘충격’, ‘놀라움’, ‘혼돈’, 심지어 ‘패닉’ 같은 용어들이 자리잡았다. 누가 충격받았고, 누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이었을까? 미국의 주류 여론을 자처해온 소위 ‘동부 언론’의 보도와 분석, 그것도 트럼프의기행이나 극단적 말만 발췌하여 단순 전달해온 한국 언론들 스스로의 자화상(自畵像)은 아니었던가. 


그만큼 공화당내의 많은 경쟁자를 꺾고 최종 후보로 올라선 트럼프 돌풍 현상의 본질에 우리 언론은 주목하지 못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의 저변 기류에도 무지했다. 당연히 트럼프 공약에 대한 철저한 분석도, 트럼프 철학에 대한 연구도 없었다.


정부의 분석이나 대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개 언론이 제시하는 만큼 언론이 제기하는 정도에서 맴돌곤 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안목이었다. 미국 대선에서는 더구나 ‘최순실 게이트’까지 겹치면서 트럼프에 대한 정부의 준비도 제대로 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연구하면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트럼프 시대, 미국은 한국에 어떤 변화를 던질 것인가. 몇몇 과제나 주제로 문제를 좁혀보자.


#1. 트럼프 정부는 한국이 과연 미국의 친구인지부터 물어올 것이다. 한미(韓美) 동맹을 기본으로 하되 때로는 친(親)중국 노선을 취하는 식의 양다리전략 같은 것은 쉽지 않게 됐다. 미국 등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2류 국가’ 정상들과 함께 천안문 망루에 올라가 인민해방군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이 어려워질 것이다. 대북정책도 한층 어려워졌다고 봐야 한다.


#2. 미국의 대외정책은 고립주의와 강경노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전망이다. 뉴트 깅리치, 마이클 플린, 존 볼턴, 제프 세션스 등 초기 국무·국방 장관의 하마평(下馬評)에 오른 면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령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중국과 갈등을 감추지 않은 채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게 당연히 모범 대답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당선된 지 불과 며칠만에 ‘환율조작국’이란 강한 제재가 내려질 것으로 예고됐다. 미국과 중국의 긴장관계는 안보이슈를 넘어 경제문제에서 더욱 첨예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3. 자유무역의 흐름에 일단 제동이 예고됐다. 당장 오바마 행정부의 최대 실적의 하나로 내세워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미국 의회에서 비준이 어렵게 되었다. 미국이 빠지면 TPP는 용도폐기나 무기연기 상태가 된다. 트럼프 당선 사흘만에 미(美) 의회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자 미국의 언론들은 보호주의의 회오리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기류에서 캐나다·멕시코 등과 오래 전에 체결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의 철회까지 시간문제라는 전망이 나왔으나 그 정도 수준으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적지는 않다. NAFTA의 재협상 또는 폐기도 주요 공약사항이었다.


#4. 한미 FTA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선거과정에서 트럼프는 “한미 FTA는 미국의 일자리를 잡아먹는 킬러”라며 꼭 집어 한국을 겨냥한 발언을 했다. 미국 중부의 퇴락한 공업지역인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를 방문한 자리였다. 선거 때의 이 발언이 흘러가는 말이 아니라면 한국은 단단히 준비를 해야만 한다. 다만 통상과 외교에 관한한 미국에서는 의회의 권한이 강력하기 때문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낙관론도 없지는 않다. 


TPP외에 NAFTA나 한미FTA의 재협상권이 기본적으로 대통령에게 있지만 좀더 다각도로 미국의 이익을 저울질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미 FTA의 폐기는 미국에서도 반론이 만만치 않을 만큼 현실적인 시나리오로는 오히려 재협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재협상이라지만 미국 측 문제제기의 핵심은 한미FTA의 완전한 이행요구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약값 결정과정의 투명성,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의 투명성, 법률시장의 개방,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 단속, 지식재산권 보호 등이 그동안 미국이 제기해온 이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굳이 미국 측 요구가 아니더라도 한국 스스로 산업발전과 구조개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법률시장을 개방한다면서 외국로펌의 지분을 49% 이하로 제한하는 식이면 FTA 취지와 어긋나게 된다. 트럼프식 보호무역이나 통상압력으로만 볼 게 하니라 한국의 경쟁력 강화와 구조개혁의 기회로 본다면 어렵고 불리한 일만도 아니다.


#5. 감세 등 자유주의 경제정책이 현저해질 전망이다. 당장 15%로 내리겠다는 법인세의 인하 공약이 어떻게 결정될지 관심거리다. 보수적 성향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The Heritage Foundation) 출신들이 트럼프 주위에 약진한 것이 주목됐다. 


이에 따라 공화당 정강 정책은 좌편향적 정책의 유혹에서 벗어나 원래 위치로 돌아갈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파리협정 등 기후변화 이슈와 관련된 민주당 정부의 기존 대외 환경정책들에 큰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금융 중심에서 제조업으로 경제와 산업의 기본 축이 변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러한 정책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 트럼프 정부는 과거 ‘레이건 행정부’의 모습과 가장 유사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실제로 트럼프의 공약과 언급을 분석해보면 레이건식 미국의 재건이라는 분석이 있다. 트럼프가 당선되기까지에는 소위 ‘정치적 허용선(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비판도 한몫 했다. 그의 당선 직후 미국에서 나온 이 분석은 기존 워싱턴 정가의 뒤집기가 워싱턴 정가의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불안감으로 트럼프 시대를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한국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의 우세를 점쳐온 미국 ‘동부 언론’의 단순중계에 그쳤던 국내 언론의 부실과 오류가 컸다. 


이제 트럼프의 공약집을 다시 분석하고 그의 언행을 차분히 재분석할 필요가 있다. 다만 당선이후 그와 측근 인사들에게서 나오는 변화의 조짐도 함께 눈여겨봐야 한다. 어디서나 선거는 선거, 공약은 공약이라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간접자본(SOC)에 1조 달러를 투입하겠다는 공약처럼 우리에게 기회가 될 대목도 군데군데 충분히 있다. 트럼프 정부의 큰 방향은 정해졌다. 하지만 통상과 교역, 외교와 안보, 산업과 금융, 이민과 교류, 문화와 교육, 특허와 신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정책의 도입과 변화 여부는 이제부터 하나하나 결정되어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백악관(白堊館)에 새로 입성하는 새로운 세력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긴밀하게 보면서 민감한 어젠다(agenda)에도 하나하나 대응체제를 가동해 나가는 것이 중요해졌다. 과거의 분석이 옳았느냐 그러지 않았느냐는 뒤늦은 논쟁이 되어버렸다. 트럼프의 당선이 당위냐 아니냐는 식의 왈가왈부는 더더욱 불필요한 논쟁이 됐다. 


앞으로 한국의 의사와 이익을 반영할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인적 네트워크를 찾고 다지는 한편 새로운 미국 정부에 공조도 하고 맞서기도 할 이론과 논리적 무장도 단단히 해야만 한다.